원주변(邊/邉)씨 전서공파(典書公派) 및 첨지공파(僉知公派)
심양후(원), 전서공파(고려장관), 첨지공파(조선소장)
W1. 1334-1390 안열(렬) 安烈 (량의 차남)
원주변씨 시조, 원천 부원군 (原川 邊氏 始祖, 府院君)
대은 변안열 시조님 632주기 시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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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 順帝 至正間 封 王棋爲 恭愍王 尙魯國公主爲 王后 東歸 擢 三大將 八學士侍御以遣 公與 叔父安烈 庶叔安緖 共隨以東 公仕 麗朝位至 戶曹典書 安烈 三樹大功封 原川府院君 賜 本原州 是時 朱氏 起兵於 明州 以北奴攻陷 遼東 橫絶中原之路 公叔侄相扶仰天痛哭曰 皇天不恤 胡兵遮途 不知父母兄弟妻孥之存沒於 兵革之中 神魂飛喪心胃如裂 大明 洪武二十五年 恭讓王四年 七月十六日 我太祖大王 卽位于 壽昌宮 悉㕣文武百官入朝 公不朝 曰 吾維中國人爲 魯國公主臣事 恭愍王何因更事二君乎 我朝拘囚家率而訖不從俱死獄中 公 與子乙忠扶杖 渡碧瀾渡 歸耕 白川南面因家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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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열은 고려 충숙왕 3년(1334) 원나라 심양에서 아버지 량과 어머니 곽씨 사이에서 3남 1 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째 아들은 안백이고 세째 아들은 안서이다. 원나라 순제가 지정(원 순제의 3번제 기간 이름) 때, 고려의 왕를 공민왕으로, 노국 공주를 왕후로 임명하였다. 요동록 (搖動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홍건족이 봉기하고, 노국 공주가 원나라를 해를 끼칠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서, 원나라 왕은 노국 공주를 다른 나라로 보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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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열은 량의 차남이며, 원주변씨 시조(원주변씨 시조 原州 邉(邊)氏 始祖)이다. 원나라 칭기스칸의 7대손인 노국공주가 공민왕과 결혼을 하기 위해, 안백의 둘째 아들, 숙은 숙부 안열, 안서과 함께, 원에서 고려로 올 때 노국 공주를 수행하였고 3명의 대장군과 8명의 관료도 같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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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9년 고려의 충정왕 1년에 강릉대군, 왕기,를 노국 공주와 결혼을 시키고, 1351년 고려의 충정왕 3년에 노국 공주가 고려로 갈 때, 3명의 대장과 8명의 학사들이 같이 고려로 갔다. 3명의 대장과 8명의 학사는 공소(孔紹), 변숙 (邊肅), 황보영 (皇甫榮), 감규 (甘揆), 독고억 (獨孤億), 황석기 (黃石奇), 장경(張敬), 노은경(盧誾儆), 방두현(龐斗賢), 서문기(西門記), 안만세(安萬世), 양기(楊起), 음준(陰俊), 전유겸(錢惟謙), 정사조(程思組), 팽적(彭逖) 등이다. 숙은 고려로 와서 호조전서(현재 장관)를 받았다. 안열은 큰 공을 3 번 세워서 원천(지역 이름) 부원군(현재 국무총리급에게 주는 명칭)이 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공민왕은 안열에게 고향 또는 원주 변씨 본관을 원주로 부여받았다. 변안열이 원주 원씨와 결혼을 하여 원주를 본관으로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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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주원장이 명나라 북쪽에서 기병을 일으켜서 요동을 공격하여 안열은 고려에서 원나라로 갈 수가 없었다. 원문에는 '주원장이 길을 막아 나는 중원을 갈 수 없다'라고 써 있다. 그러나 '중원'이란 '나라의 이름'이 아니고 '지역'을 뜻한다. 중원은 낙양분지 또는 동아시아 대륙의 지역을 말한다. 숙부인 안열과 숙은 서로 어깨를 대고 하늘을 바라보며 애도하며 울었다. “하늘은 왜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는가? 주원장의 군대가 길을 막아서, 아버지 어머니, 형제, 처, 자녀의 생사를 모르게 하고 전쟁 속에서 영혼만은 떠나가고 심장도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안열과 숙은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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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홍무 25년 그리고 공양왕 4년(1392년) 7월 16일(1392년 8월 4일)에, 조선의 첫번째 왕,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수창 궁궐에서 왕이 되는 행사를 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참여하였지만, 안열은 참여하지 않았다. 안열은 말했다. “저는 원나라(원문에는 '나는 중국中國인이다'라고 써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이란 '나라의 이름'이 아니고 '지역'을 뜻한다. 당시 원나라가 동아시아 대륙을 차지 하고 있어서 '중국'이라 쓴 것이다. 즉 ‘동아시아 대륙’을 ‘중국(지역이름)’이라고 표현했다)의 사람으로서 노국공주를 섬기는 것 만으로 만족합니다. 왜 저에게 두 왕을 섬기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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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가 군인들을 구속하고, 안열을 죽이고, 안열의 가족들이 모두 옥중에 가두고 죽였다. 숙은 숙의 아들, 을충과 함께 벽란도(배천군 남면)을 가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 (백천을 배천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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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후에 명나라를 세움)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변안열은 1361년 (공민왕 10년) 안우와 함께 홍건적을 이겨서, 판소부 감사(2등공신으로 현재는 차관급이다), 예의 판서(1등공신으로 현재 장관급이다)를 했다. 판밀직사사(현재 군인의 계급 소장)로 최영과 함께 제주를 정벌한 후 지문하부사 문하평리(현재 직급으로 장관)를 역임했다. 고려 왕 우왕 때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문하찬성사(현재 장관)가 되었다. 단양과 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후 원천부원군(현재 국무총리급에게 주는 명칭)라는 작위를 주고, 판삼사사 영삼사사(현재 부총리)가 되었다. 아들은 현(顯), 이(頤), 예(預)라 하였다. 대은 변안열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197, 전화번호: 02 765 7766,9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