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W21Heepung
00:00 / 19:01
II-21 희풍희풍
00:00 / 02:41

Heepung                      Soje

W21. or W13-2-1-1-1-2-4-1-2 1911-1996, 변희풍邊(邉)熙豊

 - (석연의 4째 아들(승억)의 둘째아들(명식)의 아들), 희풍(21th) >>명식(20th)>>승억(19th)>>석연(18th)

(명식의 둘째 아들은 희풍, 명식과 형식은 사촌지간)

    

  • 辛亥閏 六月二十七日生 忌丙子年九月 十四日 (1996.10.25). 室 全州李氏 己酉十二月二十六日生 忌 丙子年二月六日 (1996.3.24). 父 德雨 祖父 明旭 曾祖父 瓊薰 外祖 淸州 韓氏. 生育 四男 長曰應周 次曰永周 三曰禎周 四曰聖周

  • 21세대 변희풍 이 가승을 손자에게 주면서, 많은 후손들이 어떤 사람이 조상인지를 쉽게 알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이었다. 후손을 위한 희풍의 바람은 조상을 잘 섬기고 평안하라이다. 희풍은 황주변씨로 생각하면28세대 후손이다 그리고, 원주 변씨 21세대, 전서공파 20세대, 첨지공파 15세대 후손인 것이다. 석연의 4째 아들(승억)의 둘째아들(명식)의 아들이다. 즉, 희풍, 21세대이고, 명식, 20세대이고, 승억, 19세대이고, 석연은 18세대이다.

  • 희풍(熙豊)은 1911년(신해) 윤6월27일(1911년 7월 22일, 기록에는 1909년 6월 27일)에 태어나서 1996년에 10월 25일에 사망하였다. 희풍의 원래 주소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 신대동 855이었으며, 다음 주소는 서울특별시 한강로 2가 187, 다음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로 6, 서울 용산구 용문동 5번지18(?~1968),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89-16 (1968~1984 희풍은 청파동 집 지을때 관리감독 했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4길 35-1(1984~2016)이었다. 희풍과 소제는 1927년 2월 2일에 결혼했다 (그는 16살이었다). 희풍의 묘지는 대지공원 (변희풍, 이소제) 특-5-15,16에 있으며, 주소는 “전화82-43-878-3854, 충북 음성군 생극면 오신로 504-63, 2” 이다.  Website는 www.daeji-park.com이다.  

  • 처는 전주이씨 이소제(少娣)는 1909년(기유) 12월26일에 태어났고 1996년 3월 25일 10시 10분에 사망(서초구 반포동30-1: 정주의 자택) 했으며, 처의 부친의 성은 이덕우(李德雨), 처의 모친의 한선녀 韓先이다. 처의 조부는 명욱(明旭), 처의 증조부는 경훈(瓊薰), 처외부의 성은 한씨(청주 한씨 淸州 韓氏 한씨 청주)이다. 이전 주소는 “대한민국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 산도리 2-59번지”였다.  

  • 그는 4 명의 아들과 1 명의 딸이 있다. 첫번째 아들은 응주(應周)였고, 두번째 아들은 영주(永周)였고, 세번째 아들은 정주(禎周), 직업은 전문 회계사, CPA, 4 번째 아들은 성주(聖周)이다.  희풍의 두번째 아들인 영주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살았으며 그의 4 번째 아들인 성주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살았다.

  • 희풍은 입양이 되어 21세대를 이었지만, 한국 전쟁시 개성에서 서울로 피난을 오면서, 입양되기 전의 희풍의 진짜 형제들과 왕래가 많았다. 서울로 피난 온 후, ‘서울 용산구 용문동 5번지 18’ 주소지에 살 때는 희풍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입양되기 전의 희풍의 원래 형제들의 자손들도 거의 동고동락으로 한 것으로 기억한다. 희풍은 피난 오기전 개성에서 지내던 주택은 방이 99개라고 하며 자랑을 하였다. 희풍은 피난 온 후 대부분을 집에서 지냈으며, 손자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 갈수 없는 고향, 개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고, 조상에게 예를 지키는 법을 손자에게 알려주었다. 다음은 변희풍이 글의 내용입니다. “변씨 가문에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잘 어울려서 행동하고, 주위의 모든 일을 살피면서, 마음에 가진 뜻을 최선을 다해 이루면, 변씨 집안에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邊門堂中慶雲起. 應天順人智盧新. 周到凡事心氣活. 一展大志聲四隣.

  • 희풍은 항시 일찍 일어나서 집 앞의 마당을 청소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였다. 그는 아침식사는 항상 간단히 먹고, 운동을 하였으며, 오전시간은 신문 또는 도서 등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매우 청결한 사람이었으며, 오후에는 외부에서 시간을 보내었으며, 저녁식사 전에는 항상 집으로 귀가하는 습관을 가졌다. 희풍은 손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무엇을 준비하며 제사 절차를 직접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가리켰다. 그는 매우 자세하게 가리켰으며, 그의 가르침의 방법은 경험이 풍부한 선생님처럼 보였다. 또한 변희풍은 항상 식사 시간에 대화를 즐겼다. 그는 식구들에게 오늘은 어떠하였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내일의 계획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등을 하였다. 다음은 변희풍의 손자가 기억하는 변희풍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는 젊은 시절의 사진으로는 매우 건장했으며, 희풍이 직접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이가 70세쯤의 그의 모습은 키는 175 cm 또는 5 ft 8 in 정도 그리고 몸무게는 65 kg 또는 143 lb 정도로 그의 손자는 기억한다. 그는 좋아하는 음식은 비빔 국수, 갈비로 만는 soup 과 고향의 토속적인 음식이었다.

  • 희풍의 직계의 손자들, 원주 변씨 23세대,과 그 후손들은 모두 외국에서 살고 있다. 원주 변씨의 조상들은 원주 지역이라는 본관의 개념이 존재했고, 당시의  본관의 개념은 조상의 고향인 동시에 평생을 살던 곳의 의미였다. 황주 변씨 시조는 송나라에서 고려(리) 나라로 이주하며 황주 지역이 본관이 되었고, 원주 변씨 시조는 원나라에서 고려(리) 나라로 이주하며 원주 지역이 본관이 되었다. 현대 시대에는 조상의 본관이라는 개념의 의미가 외국으로 이주가 쉬운 현시대는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조상의 본관의 의미를 현시대에 적용한다면, 희풍의 직계의 후손들은 남한에서 외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 지역의 본관이 만들 수도 있겠지만, 현시대는 본관의 의미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희풍의 직계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본관과 파조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며 한국의 원주 변씨 뿌리를 찾을 때도 용이할 것이다.

heepung tomb.jpg
변희풍이소제호적.jpg
Heepung byun.jpg
soje.jp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