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변(邊/邉)씨 전서공파(典書公派) 및 첨지공파(僉知公派)
심양후(원), 전서공파(고려장관), 첨지공파(조선소장)
H6. or H5-2. 1247-1309, 순 (順) (눌의 둘째아들) 심양지역 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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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仕 元朝 行瀋陽潞 管軍民千戶候, 麗朝 追封 三重大匡 門下贊成事 判 禮儀 司事 上護軍, 遼東錄云 公以 遼東大摠管 策功爲 大將軍 封 瀋陽候, 夫人 吳氏, 墓在 中原 神主 庚辰四月十九日 埋安 于 楊洲 乾川面 吾利洞 (瀋陽潞 管軍民千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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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은 눌의 둘째 아들이고 원나라 심양 지역의 관료, 군인, 민간인 1000세대 다스리는 제후(봉건 시대에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그 영내의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지던 사람)를 받은 후, 고려에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 (현재 장관) 판 예의사사 상호군(현재 군인 계급 소장 급)을 지냈다. 요동록(요동 지역의 기록지, 요동은 요하(Liao River)의 동쪽)에 의하면 변순은 대장군(현재 군인 계급으로 준장 급)으로 요동 대총관(요동 지역의 총지휘관)의 정책에 공을 세워 심양 후(심양지역의 제후)가 되었다. 부인 오씨다. 순의 처의 묘소(실제 무덤)는 중원 (허난河南성의 낙양분지 말한다)에 있다. 당시 원나라가 차지한 대륙은 모두 중원을 뜻하기 때문에 중원의 원래의 뜻은 낙양분지이지만, 순의 처의 묘소는 순의 묘소인 심양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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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의 묘소는 심양瀋陽 백안동伯顔洞 (심양백탑가도 沈阳白塔街道)북쪽에 있다. 순의 제사하는 날은 1280년 4월19일(1280년 5월 19일)이며, 양주 건천면 오리동에 모셨다. 현재 경기도 양주시이다. 제사날과 모시는 날이 순과 량이 같은 것을 보면 오류가 있는 듯 보인다.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혼령이 오는 장소를 신주(神主, An ancestral or spirit tablet)라 한다. 묘(廟) 혹은 묘실(廟室)은 신주를 가지고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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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고려 사신으로 원나라에서 가서 원나라 관직하고 원나라에 산 경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외교적 목적: 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교류를 증진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군사적 목적: 고려 시대에는 원나라와의 군사적 갈등이 빈번했다. 때때로 고려는 원나라에게 사신을 보내어 협상하거나, 특정 관직을 맡아 원나라 내에서 고려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회적 이동과 기회: 순이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인해 원나라에서 인정받고 기회를 얻게 되는 경우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이동은 조상의 경력과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으며, 가족이나 후손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순이 고려인으로서 고려 사신으로 원나라에서 관직하고 원나라에 산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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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의 첫째 아들은 석(碩)은 황주(黃州) 변씨로, 눌의 둘째 아들 순(順)은 원주(原州) 변씨로 분리되었다.
H7. or H5-2-1. 1264-1338,량 (諒) 심양지역 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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襲行瀋陽候 麗朝追封 誠勤翊祚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 判三司事 上護軍. 夫人郭氏. 墓在 中原 神主庚辰四月十九日 埋安 于楊州 乾川面 伍利洞 (瀋陽潞 管軍民千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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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량은 순의 아들이고, 심양지역 제후를 이어받았다. 고려에서 성근익조 공신(이 칭호는 그들의 충성심과 덕행, 공적인 업적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들의 명예와 지위를 상승시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이며,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title name)의 판삼사(현재 국무총리 급) 상호군(현재 군인 계급 소장 급)을 받았다. 부인은 곽씨다. 부인의 묘소는 중원(낙양)에 있다. 당시 원나라가 차지한 대륙은 모두 중원을 뜻하기 때문에 중원의 원래의 뜻은 낙양분지이지만, 순의 묘소가 심양에 있듯, 량의 묘소인 심양일 것이므로 량의 처의 묘소는 심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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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의 제사하는 날은 1280년 4월19일(1280년 5월 19일)이며, 양주 건천면 오리동에 모셨다. 순과 량의 제사날과 모시는 날이 같은 것을 보면 오류가 있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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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이 원나라에서 심양후(瀋陽侯)로 명령받은 후에, 고려에서 관직(官職)을 받은 이유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아래는 일반적인 이유들 중 몇 가지이다. 충성과 공로: 량이 원나라에서 심양후로 활약하여 원나라에 대한 충성과 공로를 쌓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충성과 공로가 고려에서 인정되어 관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문의 관계 및 연결: 가끔은 가문의 관계나 연결이 관직을 받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량이 고려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과의 연결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를 통해 관직을 받을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가 정책: 고려시대에는 국가 정책에 따라 인재를 유인하거나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량이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거나, 전략적으로 필요한 인재로 평가되었다면 관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