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변(邊/邉)씨 전서공파(典書公派) 및 첨지공파(僉知公派)
심양후(원), 전서공파(고려장관), 첨지공파(조선소장)
W2. ?-1399 숙 (肅) 원주변씨 전서공파, 典書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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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 叔父貫 原州. 至正 辛卯 府院君 以首將陪 魯國公州 而東還 公以 第六學士 亦 隨而來 仕麗朝 至 嘉靖大夫 戶部典書. 公 見麗運將葦誓心 不二登不朝 覲與 曺林孟 諸賢 握手而言曰 余臣事 恭愍王 何忍 更事二君乎 及聞 鄭圃隱夢周 遇禍 潛然 流涕 曰鮮 我愛矣疇倚存者我. 太祖知其罔 僕囚 公妻孥致死獄中 而竟不顧與 子 乙忠 西渡 碧瀾 津隱於 白川居 鴨山 下號其里勿屈 名其村 曰慕麗. 墓 在 延安 東面 龍鬚山東麓 宰卿洞 卯座 有碑. (典書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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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은 전서공파의 시조이다. 안열과 숙은 작은 아버지와 조카의 관계이다. 고려에서의 혈연적 원주 변씨의 시초는 변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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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은 원주 변씨이다. 전서공파인 숙이 안열로부터 명을 받아 원주 변씨 본관을 원주로 하였다. 1351년(지정至正 신묘년辛卯年)에 노국공주가 고려에 올 때 안열이 수장이었다. 숙은 제6학사로서 고려에 왔다. 그리고 숙은 고려에서 '가정대부'의 '호부전서'에 이르렀다. 호부는 조세 및 국가 재정과 관련된 부분을 담당하는 부서이고, 전서는 현재 장관에 해당된다. 숙은 고려의 장래가 위태할 때 숙과 조림맹은 고려 왕 공민에 충성을 다 할 것을 맹세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숙과 정몽주는 서로 의지하고 함께 했던 사람이라고, 숙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정몽주의 아호는 포은이다. 태조(이성계)가 이를 알고 숙의 처와 자식을 감옥에 가두었고, 숙은 아들, 을충과 서쪽에 있는 벽란진을 건너갔다. 그리고 숙과 을충은 배천 압산에 은거하였다. 묘소는 연안군 동면 용수산 동쪽 기슭에 있는 재경동(개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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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 자(字)가 자엄(子嚴)이고 호(號)가 모려당(慕麗堂, ‘당’은 호의 붙이는 존칭)이고 시호(諡號) 또는 휘(諱)가 문절(文節)이다. 관직은 고려 때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전서(戶曹典書 현재 장관과 같은 직급)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왕을 두명 모실수 없다는 충절을 지켜, 배천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려절사(慕麗節士)라 하였다.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모려절사(慕麗節士)란 고려를 동경하고, 절개를 지킨다는 뜻이다.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 옛지명이다. 벽란도는 예성강을 끼고 있으며, 연안군과 개성의 사이에 있다. 벽란도의 '도(渡)'자는 섬이 아니라 ‘벽란진(津)’ ‘벽란포(浦)와 더불어 나루를 뜻한다.
벽란도碧瀾渡는 벽란진碧瀾津 와 벽란포碧瀾浦의 합성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