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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原州변씨邊(邉)氏 전서공파典書公派 인물人物  

 

다음의 조상들이 살아던 시기는 조선왕 선조와 인조시기이다. 전쟁을 겪은 시기는 선조와 인조 때였으며,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최악의 왕으로 평가한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 리더십 부족을 보였고, 인조는 반란으로 왕위에 올라 정묘호란을 초래했다. 또한 조선왕 인조 이후, 조선의 신하는 조선의 왕은 무시하고 오직 왕은 명나라의 왕만 인정하는 정치를 하였다. 전서공파 시조인 숙은 반란으로 세운 조선이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조선과 담을 쌓았다. 조상의 전공은 후손에게 영예롭지만, 권력자들의 잘못을 수정하려는 기록은 없었다. 그런 기록이 있었다면, 숙의 뜻에 부합되어 더 명예로웠을 것이다. 조선을 이은 나라는 민주주의 체제임에도 과연 조선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의문이다. 숙이 권력의 폐단을 경고했던 통찰은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며 과거의 교훈을 올바르게 활용하지 않으면 발전보다 퇴보의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반전을 하더라도 명분이 있어야 반전의 의미가 있다. 조선은 건국에 대한 명분이 없어 명나라의 도움으로 조선 건국의 명분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명분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다른 나라에 의존하려는 형태의 나라였다. 또한 이러한 좋지 못한 형태는 안타깝게  남한까지 이어진 현실이다. 현실에서는 조선은 명나라에게 의지했지만 명나라에게 조선은 중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현재에도 남한은 미국에 의존하지만 미국에게는 남한은 우선순위가 아니며 신경쓰지 않는다. 그져 명나라나 미국은 조선이나 남한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국익이 우선이며, 명이나 미국은 조선이나 남한의 이득이 우선되는 일을 진행하면 명이나 미국은 조선이나 남한에 문제를 항상 제기한다. 명이나 미국은 그들의 지시를 잘 따르는 조선관료나 남한 정치인을 지지한다. 조선관료나 남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득에 따라 행동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국익을 해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되며, 역사적으로 조선관료나 남한 정치인들의 이득은 국익을 해하는 경우는 많았다. 명이나 미국은 조선이나 남한의 국익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의 이득에만 촛점을 마춘다. 어리석은 자들은 명이나 미국은 그들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것이 조선이나 남한의 국익에 이롭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득을 최고 우선시하는 것은 그들이 바보라서 그러는 것은 아닐것이다.  조선이나 남한의 정부나 조선이나 남한의 국민은 조선이나 남한의 이득이 우선인지 명이나 미국의 이득이 우선인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명확하며,  조선이나 남한의 정부나 조선이나 남한의 국민은 명이나 미국과의 외교를 어떻게 해야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만약 남한의 독재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아직 민주주의 시민으로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삶보다는 왕조시대의 주권이 없는 피지배계층인 하층민이나 독재시대에 쇄뇌교육으로 인한 피지배계층인 하층민의 삶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피지배계층이라는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참고도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자유로부터의 도피 

  • 변량(양)걸 (邊良傑, 1546~1610)는 원주 변씨 7세대이다. 그는 전서공파이면서 정의공파의 시조이다. 그는 조선 시대 무신이다.  그의 자는 국화(國華)이다. 변위(偉)의 아들이다. 그는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한 뒤, 용양위부장(龍양衛部將) 벽동군수 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 강계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1583년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경원부(慶源府)에 침입하자 길주목사이고 조방장으로 출전하였다. 그는 1591년에는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충청도병마절도사와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그는 1597년 경기우도방어사(京畿右道防禦使) 가 되었으며 1599년에는 훈련대장이 되었으나 문신·언관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 군사들 가운데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난을 일으키자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훈련대장에 복직되고, 그는 지중추부사·지훈련원사가 되어 비변사의 군국(軍國) 대사에 참여하였다. 그는 1604년 포도대장으로서 임진왜란 후 혼란한 장안의 치안을 바로잡았다

  • 변흡 (邊潝, 1568~1644)는 원주변씨 8세대이다. 그는 전서공파이면서 정의공파이다. 변양걸의 아들이다. 그는 조선 시대 무신이다.  그는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 1617년(광해군 9) 종성부사(鍾城府使) 가 되었다. 그는 1622년에는 등극부사(登極副使)로 상사(上使) 오충겸(吳充謙)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왔고,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서 양서순변사(兩西巡邊使)를 겸하여 난의 평정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으로 책록되어 원흥군(原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1629년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교동현(喬桐縣)을 교동부(喬桐府)로 승격시키고 경기도 수영(水營)을 교동부로 옮기게 할 때 경기도 수군 절도사 겸 교동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삼도 수군 통제사와 오위도 총관을 역임하였다.

  • 변복일 (邊復一, 1598~?)는 원주 변씨 9세대이다. 그는 전서공파이면서 정의공파이다. 자(字)는 수초(受初)이다. 그의 아버지는 변흡이고 할아버지는 변양걸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변위이다. 그는 무술(戊戌) 1598년 (선조 31)에 태어났다. 그는 조선 왕 광해군(光海君) 13년(1621) 관직을 얻었다. 그의 관직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목사는 정 3품 (正三品, 현 관리관)이다.

  • 변급 (邊岌, 1598 ~ 1660)는 전서공파이다. 그의 아버지는 모른다. 그는 조선 시대 무신이다. 그는 1654년(효종 5) 함경도 병마우후(咸鏡道兵馬虞候)로 일했다. 그는 청나라 군사와 함께 러시아와 전투를 위해 전장으로 나갔다. 나선정벌(羅禪征伐)이라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뜻이다. 그는 조총군(鳥銃軍) 150여 명을 거느리고 두만강(Tumen River)을 건너갔다. 그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영고탑(寧古塔: 寧安)에서 후통강(厚通江: 混同江)까지 러시아군대을 전투하였다. 그는 호통(好通)에서 러시아 군대를 크게 격파한 뒤 토성을 쌓아 방비케 하고 돌아왔다. 그는 1656년 전라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충홍도(忠洪道) 수군절도사에 전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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