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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변씨한국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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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변씨

A. 백가성 ('백개의 집안의 성'이라는 책 百家姓)

  • 성씨에 관한 오래된 문헌으로는 '백사성 ('백개의 집안의 성'이라는 책)을 말할 수 있다. 약 천년 전에 북송(北宋) 초기에 만들어진 운문 題文 형식의 글로서, 저자는 미상이다. 책에서 변씨(邊氏)는 313번째로 실려 있다. ‘백가성’에 의하면, 변씨는 번성하고 다재 다능한 성씨 중 하나이며, 그 성姓의 기원을 다음 세 가지로 꼽고 있다.

  • 첫째, 춘추시대 B.C. 770-B.C. 403, 송(宋)나라의 평공(平公)의 아들 중 어융(禦戎)이란 자가 있었다. 어융의 자(字)가 변 (邊)이었다. 그의 손자 변(邊)이 사도(司徒)가 되어 조부의 자(字)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은나라 29대 왕 제을의 아들인 미중의 후손이 어융이다. 은(殷) 나라는 고조선의 조상이다. 한국의 조상인 고조선의 사람들은 동이(東夷)이라고 한다. 한민족(韓民族) 원류를 형성하는 부여, 고구려, 백제, 예맥, 삼한 등이 동이로 불렸으며, 말갈, 선비, 오환, 왜 등도 동이로 불렸다.

  • 둘째, 은股나라 때 제후국 중에 변국(邊國 Byun Country)이 있었다. 변국(邊國 Byun Country)의 그 군주를 변백 (伯)이라고 했는데, 그 후 변을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 셋째, 청(淸)나라의 조선인의 성씨로, 다른 씨족이 변(邊)으로 바꾼 자가 많아 지금도 만주족이나 조선족 등의 소수 민족 중에 변씨가 많다고 한다. 셋째 설은 청나라(1616-1912) 이야기이니 제외하고,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한국의 변씨는 어융의 자(字)를 성(姓)으로 삼았다는 설을 따르고 있다.

 

B. 동아시아에서 변씨의 이주(移住)

  • ‘백가성’에 의하면, 변씨는 춘추시대 (770~B.C. 403 )에 송나라(군주국)에서 기원하였는데, 송나라의 도읍지가 지금의 하남성 (河南省)의 상구(商丘)에 있었기 때문에 변씨가 그곳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변씨라는 성이 생긴 이후에 오랫동안이 지역에서 변씨가 늘어났다. 송나라가 망한 후, 진(奏), 한(漢)때까지 변씨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하남성(河南省)과 산동성(山東省)과 안휘성(安徵省)과 강소성(江蘇省)과 섬서성(俠西省)으로 점점 흩어졌다. 이 지역들은 송나라와 가까운 지역이었다.

  • 전한시대 (前漢 時代 202 BC~ 25 AD)에는 변통(通)이라는 사람이 유명하다. 동한시대 (東漢 時代 25-220)에는 경조윤 변봉(京兆尹 邊鳳), 구강태수 변양 (九江 太守 邊讓), 상서령 변소 (尙書令 邊韶) 가 모두 진류군(陳留郡) 출신이다. 진류군(陳留郡)은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河南省 開封市) 동남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동탁 전(箽卓 傳)에 나오는 변장(章)도 감숙성 금성 (甘肅省 金城)의 출신이다. 위 진 남북조(魏 晉 南北朝 221-589) 시대에는 금성에 거주하는 변씨가 많아졌으며, 금성군과 이웃하고 있는 농서 군(聾西 郡)으로 옮겨 사는 자들도 생겨났다. 구강태수 변양 (九江 太守 邊讓)은 한(漢)나라에서 구강(九江)이라는 지역에서 태수(太守)를 지냈다. 변양(邊讓)의 전(傳 story)에 따르면 변양은 뛰어나서 조조(曺操)가 시기해서 그를 죽였다고 한다. 변양이 구강(九江)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Courtesy name을 구강(九江)의 태수(太守)라 한다. 잡록 (雜錄)에서는 한 (漢)나라의 선조 (宣祖) 시기에 예부 상서 변기후가 말하기를 “동아시아 대륙과 동아시아대륙 이외에 있는 변씨는 모두 변양(邊讓)의 후손이다. 그리고, 변순(邊順)도 역시 변양(邊讓)의 후손입니다” 라고 하였다.

  • 황하(黃河)의 범람으로 인해 피해가 많았으나, 오직 농서군만은 자연환경이 좋았다. 더욱이 혼란스러운 중원(낙양)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변씨는 농서군에서 대족(大族)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수(隨)나라 (581-618)에 이르기까지 중원(낙양)지역은 전란으로 불안하였고 사방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더욱이 전염병이 퍼지고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겹쳐 백성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았다. 백성들은 쓰러져 죽거나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것을 감수하며 강남(江南 일반적으로, 강북(江北)은 북경, 서안, 낙양, 심양 등이 말하고, 강남 (江南)은 상해, 항주, 소주, 광주, 심천 등이 말한다)으로 도망을 쳤다. 변씨는 이러한 전란을 겪으면서,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강소성 (江蘇省), 절강성(浙江省), 강서성(江西省)등지로 점점 흩어졌다. 수(隨)나라에서 당나라(唐) (618-917) 때에 변씨는 여전히 북쪽 지역에서 번성하였는데, 지금의 산서성(山西省)과 북경(北京), 천진(天津)에는 변씨들이 많이 살았으며, 하북성(河北省), 섬서성(俠西省), 감숙성(甘肅省)이 변씨들이 주로 살았다. 당(唐)나라 말기에서 오대 십국(五代 十國907-960) 시기에 변씨 활동의 중심은 강남으로 점점 이동하였다. 북송(北宋 960-1126) 과 남송(南宋 1127-1279)에서 원(元 1206 -1368)에 이르는 시기에 변씨는 지금의 남쪽에 위치한 호남성(湖南省), 사천성(四川省),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省) 등지로 퍼져 나갔다.

  • 특히 북송 말기 진류군(陳留 郡)일대에 거주하던 변씨들은 금(金)나라(1115 -1234)가 침략하자 남쪽인 절강성으로 이주해 정착하였다. 이후 제기(諸墍 지금의 주지시 诸暨市)를 중심으로 약 팔백 년 동안 집성(集姓)하였다. 그리고 북방 내몽고 지역에는 섬서성(俠西省)과 감숙성(甘肅省)에 살던 변씨가 이주하였다. 산서성의 변씨는 명(明)나라(1368-1644) 초기에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과 북경, 천진 등지로 이동하였다. 청(淸)나라 (1616-1912)에는 변씨는 서남쪽과 동북쪽, 그리고 대만으로 이주했다. 오늘날 변씨는 중국 전역에 비교적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특히 강서성(江西省)에는 변씨의 약 50퍼센트가 살고 있다.

  • 결국 한국의 변씨(장연, 황주, 원주)는 세보에 모두 춘추 전국시대 송(宋)나라 평공(平公)의 아들 중, 어융(禦戎)의 자손이고,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농서(聾西 郡)에서 대족(大族)을 형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는 상나라 왕족이자 주왕의 이복형 송미자 계(宋微子啓)가 분봉 받은 나라다. 다음 Figure 에서는 시대별 변씨들의 주거지를 보여준다.

 

C. 문헌에 따른 한국 성씨, '변'의 연원

  • 동아시아 도래설: 문헌비고(文厭備考)에 따르면, “은나라 미중(微仲)이 송(宋)에서 평공(平公)시대에 이르러서, 아들 어융(禦戎)의 자(字 courtesy name)가 변邊이었다. 어융(禦戎)의 자손들은 그의 자(字 courtesy name)인 변(邊)을 성(surname)으로 사용했다. 농서지방에 살다가 남송 (1127 -1279) 때, 그 일부가 고려에 귀화하여 취성 (取城 지금의 황주)에서 살기 시작했다. 조선 씨족 통보 (朝鮮 氏族 通寶)에 따르면 “변씨는 고대 중국의 황제 헌원씨(軒䡝)씨 시작되었으며, 감숙성 농서에 살던 변 앙(仰)의 후손이다

  • 토착 성씨(土着 姓氏 한반도에 있었던 성씨)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의하면, “618년 (신라 진평왕 40) 북한산주(北漢 山州)의 군주(軍主)인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공격해서 백제군을 물리쳤다. “672년 (신라 문무왕 12) 9월 문무왕이 변산(邊山)을 당나라에 외교 사절로 파견하였다.

 

D. 삼국사기에 나오는 변품(邊品)과 변산(邊山)의 변(邊)이 성씨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가지이다.

  • 첫째, 신라의 진흥 왕 시기(540-576)에는 4개의 순수비(巡狩碑)이 있고, 진지왕 3 (578) 에는 무술년 오작비(戊戌年 塢作碑)가 있다. 또한 진평왕 13 (591)에는 남산 신성비 (南山 新城碑)등이 있다.  7세기 이전의 금석문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동아시아 대륙에서 쓰는 한자의 성(surname)을 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에 더하여,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의 3가지 성姓의 전설이 있고, 제3 대 유리 왕 때에는 6부 촌장에게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 )등 여섯 개 성을 주었다는 기록에 기초한다.

  • 둘째, 우리 변씨 세보에 고려시대에 동아시아에서 도래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 · 백제 시대에 변씨의 기록이 있었다고 해서, 동아시아 도래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의 고대 변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첫째, 균여대사(均如大師)는 본관이 황주이고 고려 초기 때인 923년생이므로, 균여의 아버지 변멸성(邊熾性)은 적어도 서기 800년대 생(이 시기에는 이미 후삼국시대였고, 후백제, 후고구려(고려)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신라시대라고 말하기보다는 이미 고려시대의 초기라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멸성(邊熾性)은 언제 황주로 왔는지 그의 조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둘째, 균여대사 기록보다 불과 백여년 뒤 신창 표씨 (新昌 表氏)시조인, 표대박이 고려 광종 11 년 (960) 동아시아에서 고려로 귀화할 때, 여덟 성씨와 함께 고려로 귀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덟 성씨는 장(張), 방(方), 위(韋), 변(邉(邊)), 윤 (尹), 진(奏), 감(甘), 황보(皇南)이다.

  • 셋째, 이로부터 칠십여년 뒤인 1138년 (인종 16) 장연 변씨의 시조 변유영(有寧)이 장공주(長公主)의 배신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E. 이상의 우리나라 변씨 기원을 정리하면

  • 첫째, 신라 618년(진평왕 40) 시대의 북한산주(北漢 山 州)의 군주(軍主)인 변품(邊品)과 672년(문무왕 12)에 신라에서 당나라 외교사절로 간 변산(邊山)은 고려시대 이전에 있던 신라시대의 '토착 변씨'이다.

  •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신라시대의 '토착 변씨'인 것인지 아니면 고려시대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신라로 정착한 변씨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토착 변씨로 이야기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토착 변씨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성씨를 말한다. 백가성의 세번째 설과 비슷하게, 한반도 황주의 살던 다른 씨족이 변(邊)으로 바꾸어서, 한반도의 토착 변씨로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토착 변씨는 장연 변씨와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또한 변품이나 변산의 이름의 '변'자가 이름인지 성씨인지도 확인이 불가하다. 그들은 황해도 황주에 거주하거나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균여대사도 이들의 후손으로 신라 말엽 황주에 거주하였다.

  • 둘째, 세보에 남송 때, 농서(隴西)에서 황해도 장연(長淵 옛 이름은 연강 淵康)으로 이주한 변씨가 장연 변씨이다. 황주 변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변여(呂)가 장연 변씨 시조, 변유영(有寧)의 5세손이다. 결국 남송 이후(고려시대) 여러 경로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황해도 장연과 황주에 이주한 변씨들은 본관을 장연과 황주로 통합해 가면서 정착하였다. 한반도의 토착 변씨, 아니면 고려 이전의 한반도에서 살고 이름에 변의 글씨가 있는 사람들은 송에서 고려로 이주한 장연 변씨 속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있다.

  • 셋째, 원주 변씨의 시조 대은 변안열 (大隱 安烈)의 할아버지, 변순(順, 황주변씨 6세)은 고려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변순(順)은 1268년 (고려 원종 9) 원(元) 때, 고려에 온 사신, 탈타아(脫朶兒)가 원나라로 돌아갈 때, 고려에서 원나라로 가는 길을 보좌해 주었다. 그리고 변순(順)은 원나라에서 심양 제후(심양로 천호후 灌陽路 千戶候)를 받았으며, 그 손자인 변안열은 공민왕과 결혼할 원나라의 노국 공주가 고려로 올 때 보좌하였다. 그리고 고려로 와서 공민왕으로부터 원주 변씨를 명 받으며, 원주 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 변씨 세보에 따른 연원: 문헌상의 우리나라 변씨는 장연(長淵)을 본관으로 하는 변유영을 출발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황주변씨의 시조 변여는 변유영의 현손(玄孫)이다. 변씨는 장연에서 황주로, 황주에서 원주로 그 세대가 이어진다.

 

F. 한국 변씨

  • 장연 변씨 세보 (長淵邉(邊)氏世譜): 농서 사람 변경(鏡)이 송나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習候)를 지냈고, 신라에서 대아찬(大阿湌)을 지냈다는데 실제 기록은 없다. 변경(鏡)의 증손자인 변유영(有寧)이 1138년 (인종 16) 장공주(長公主)의 배신으로 고려에 이주해서, 중문 지후 (종6품)가 되었다. 그리고 변유영(有寧)은 연성 부원군(淵城 府院君 종 1품)에 임명되고, 변유영(有寧)의 후손들이 황해도 장연을 장연 변씨의 본관으로 정했다. 변 유영(有寧)은 장연 변씨의 시조이다. 변유영의 호(Art name)는 석천 옹(石川 翁)인데, 변 유영은 1100년대 초에 태어난 인물로 추정된다. 그런데 ‘장연 변씨세보’에 변유영의 5세손인 회 (懷)의 기록이 없고, 4세손인 현(玄)의 기록도 없다. 하지만, ‘황주변씨세보’의 기록에 따르면 변 여(呂)는 변 유영의 5세손이라고 한다. (1843년과 1984년의 장연 변씨 세보)

  • 황주 변씨 세보(黃州邉(邊)氏世譜): 변 유영의 증손자인, 변현(玄)의 아들 변여(呂)를 황주 변씨의 시조로 한다. 변여(呂)는 역시 농서 사람으로, 송나라가 쇠퇴하자 고려로 귀화하여 황주 (황주黃州 고려 때 이름; 취성取城 신라 때 이름; 동홀冬忽 고구려 때 이름 )에 정착하여 살았다. 1232년 (고종 19)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 간 고종을 시종하는 데 공을 세워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태천백(泰川伯)에 임명되어 식읍 (食邑 Tenant-in-chief)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변여(呂) 황주(黃州) 변씨의 시조 (progenitor) 이다.

  • 원주 변씨 세보 (原州 邉(邊)氏 世讀): “변씨의 기원은 송 평공 때 어융의 자(字 Courtesy name )가 변(邊)이었기에 그 자(字 Courtesy name )를 성(姓)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후손이 오랫동안 농서에 살다가, 송나라 말기에 바다를 건너 동국 (東國)의 황주에서 살았으니 그때부터 관향을 황주라 하기 시작하였다. 황주 변씨 시조 변여(呂)의 후손 변순(順)이 1268년(원종 9) 원나라 사신 탈타아(?-1271)를 보좌하여 원나라에 갔다. 그리고 원나라 왕, 세조(元世祖 쿠빌라이 Khubilai, 1215 -1294)를 만나고, 심양에 머무르는 동안에 심양 제후(심양로 천호후)의 임명 받았다. 변순(順)의 손자 안열(安烈)은 호(Art name)가 대은이다. 안열(安烈)은 1351 년 공민왕과 왕비가 될 노국공주를 보좌하여 고려로 왔다. 올 때 안열(安烈)은 그 무리의 수장(首將)이었다. 공민왕은 안열(安烈)을 공민왕의 인척인 원주 원씨이며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인 원의(元題)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민왕은 안열에게 원주(원주原州 고려 때 이름; 북원소경北原小京 신라 때 이름; 평원군平原郡 고려 때 이름) 지역을 원주 변씨 본관 (main building)으로 하게 하였다. 후손들은 안열를 원주 변씨의 시조로 하였다. 안백은 안열의 형이다. 안백의 둘째 아들, 숙 (? -1399)은 원나라 학사로 작은 아버지인 안열과 함께 고려에 왔다. 그리고 숙은 고려에서 호부전서라는 직책을 받았다 그리고 원주 변씨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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