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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정기 이후 한국 역사​와 미국 대통령 

일제강점기1910~1945:

조선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 하에 통치를 받는다. 일제강점기(1910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이 조선인을 지배하고 식민지로 삼은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인들은 다양한 어려움과 억압을 겪었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삶에 대해 설명한다.

  • 국가적 억압: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존재하게 되면서 일본의 국가적인 억압을 받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국어, 교육 체제, 법률 체계 등을 강요받아야 했으며, 일본의 국가정책에 따라 조선인들의 문화와 언어가 차차 금지되거나 억압받았다. 경제적 착취: 일본은 조선을 자원 공급원으로 이용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주로 농업과 양봉, 산업 생산에 활용되었다. 그 결과로 조선의 자원은 일본으로 수출되고, 조선인들은 저임금 노동과 착취를 당했다.

  • 문화적 억압: 일제는 조선의 문화와 언어를 부정하고 일본화를 강요했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는 무시되거나 왜곡되었고,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었다. 조선인들은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국가주의적인 일본화 정책에 따라 조선인의 정체성이 위협받았다.

  • 학문과 교육의 억압: 조선의 학문과 교육도 일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조선인들은 제한된 교육 기회를 받았고, 이를 통해 일본의 국가주의적인 가치와 이념이 주입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의 역사적인 인식과 자주주의적인 사고가 억압되었다.

  • 항일운동과 억압: 조선인들은 일본의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항일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일제는 항일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하였고, 조선인들은 구타, 체포, 학살 등 많은 억압을 당했다. 항일운동은 조선인들의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억압을 당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힘들게 저항하고, 자주주의와 독립운동을 펼치며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조선은 1945년에 일제의 패망으로 독립을 찾았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쳤다.

 

1970년~1980년대

  • 남한의 1970년부터 1980년도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당시,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검은색 일본식 교복을 입었고, 머리는 군인과 같이 아주 짧게 머리를 잘랐다. 그들이 다닌 중고등학교는 남자 중 고등학교였다. 한반의 학생 수는 60명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교련(敎鍊) 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남한의 교련(敎鍊)은 사관생도나 학군후보생, 군사학과 등 군사교육 이수자가 아닌,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에 재학중인 일반 학생들에게 실시된 군사 관련 교육훈련 과목이다. 당시남한의 의무교육은 국민학교까지이었다.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어떠한 사람도 거리를 다니지 못하는 법이 있었고, 북한 침입에 대비하여 지하도 대피 훈련도 있었다. 시내에서 장발하는 것을 금지했고, 짧은 치마를 입는 것도 금지하여 경찰들이 위반한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기도 하였다. 버스 값은 25원이었고 택시는 기본요금 500원이었다. 버스에는 버스비를 받는 버스의 여자 승무원이 있었다. 서울의 1970년도 공기는 매우 오염되어 있었다. 1975년도에 베트남은 통일이 되었고 1977년에 한국은 100억불 수출을 하였다. 1970년도에는 필리핀과 남미의 나라들과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다. 한국의 남자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면 해외여행이 금지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교육받은 사람들은 반공교육이 철저히 교육되어 있다. 영화관에서는 애국가와 대한뉴스라는 것을 영화 시작하기 전에 보여준다. 관람객은 애국가가 나오면 모두 일어섰으며, 대한뉴스는 당시 반공 교육의 한 종류였다. 한국에서도 수업 시작 전,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것을 재창한다. 선생님에게는 항시 수업 시작 전 모든 학생이 목례를 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일본식 교육의 잔재이다. 남한에서는 결혼한 여자를 부를때 그녀의 이름은 호명하지 않았다. 결혼한 여자는 누구의 엄마라고 불렀다. 가정집의 난방은 연탄 보일러를 이용하였다. 난방은 아궁기를 통해 난방을 하였기 때문에 방의 바닥은 따뜻하였으나, 난방이 직접적으로 하는 부분만 많이 따뜻했다. 당시 밥을 보온하는 전자밥통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밥그릇에 밥을 넣고 이불을 덮고 방의 따뜻한 바닥에 놓아서 밥의 보온을 하였다. 음악을 들을 때는 전축을 사용하였으며, 주요 대중교통은 버스였으며, 서울 지하철은 1호선,2호선이 있었다. 남한에서 칼러티비는 1980년부터 사용했고, 대학교 때 컴퓨터 수업은 사람 키보다 큰 캐비넷 크기의 대형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이었고 personal computer 16 bit가 사용된 것이 1985년도부터이다. 그 때 PC 가격은 250만원이었고 당시 직장의 평균 월급은 100만원보다 작았다.

 

1946~현재 북한:

  •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48년 9월 9일: 최고인민회의가 헌법을 채택, 북위 38선 이북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하였다. 북한의 대통령의 순서는 김일성(1948~1994), 김정일(1944~2011), 김정은(2011~현재)이다.

 

1912~현재 중화민국中華民國 (타이완):

  • 1912년부터 1949년까지의 중국 대륙은 중화민국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중국을 지칭하는 경우, 현재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을 일컫는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긴다. 중화민국의 대통령은 장개석蔣介石 (1948 ~1949), 이종인李宗仁 (1949~1950), 장개석蔣介石 (1950~1975), 엄가감嚴家淦 (1975~1978), 장경국蔣經國 (1978년 ~1988년), 이등휘李登輝 (1988~2000), 진수편陳水扁 (2000~2004), 마영구馬英九 (2008~2016), 채영문 蔡英文 (2016~ ) 순이다.

 

1919~현재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國:

  • 중화인민공화국(중국어: 中华人民共和国)은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의 주도로 1949년 10월 1일에 건국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는 모택동毛澤東 (1949-1959), 유소기劉少奇 (1959-1968), 송경령宋慶齡 (1968-1972), 둥비우董必武 (1972-1975), 송경령宋慶齡 (1981), 이선념李先念 (1983-1988), 양상곤楊尚昆 (1988-1993), 강택민江澤民 (1993-2003), 호금도胡錦濤 (1003-2013), 습근평習近平 (2013-) 순이다.

남한 대통령

 

1~3대 대통령은 이승만은 1948에서 1960년간 재임했다.

  •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직 수행하고 1950년에 한국전쟁 6·25전쟁이 일어났다. 1960년 3·15부정선거로 인해 일어난 4·19혁명에 의해서 4월 26일에 사임을 발표한다. 대통령 중 가장 민간인(1947년 제주 4.3사태등)을 많이 죽인 대통령이기도 하다.

4대 대통령: 윤보선

  •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유일하게 의원 내각제 정부로 대통령직 수행했지만 1962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년 5개월만 대통령을 일했다.

 

1963~1993 군사정권

5~9대 대통령은 박정희은 1963에서 1979년간 재임했다. 

  •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유신과 3선 개헌으로 5대부터 9대까지 거의 16년을 대통령직 수행하였다. 경제발전과 새마을 운동으로 유명하지만, 독재로도 가장 유명한 대통령이다. 결국 ‘10·26의거’이라고 불리는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 의사 의해 살해당했다.

  • 박정희 아들, 박지만이 경영하는 EG그룹의 자산총액은 733억 2931만여 원, 매출액은 1125억 6329만여 원이다(2018년 기준).

  • ​코리아게이트 :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 의한 남한의 경제개발

10대 대통령: 최규하

  • 박정희가 대통령을 할때 국무총리를 하였으며, 박정희 조카 처남이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한 뒤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대행으로 1979년 10월 27일부터 1979년 12월 6일까지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하고 1979년 12월 6일 대통령직을 수행하였으나 8개월 만에 신군부의 압박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대한민국 대통령 역대 최단 재임기간 대통령이다.

11~12대 대통령은 전두환은1980에서 1988년간 재임했다. 

  • 12·12사태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간접 단독 출마해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5·18광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2021년까지 5.18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사형을 선고를 받지 못해 안타까움이 있다. 그 후손들은 전두환 재임기간 모아 돈 자금을 가지고 넉넉하게 살고 있다.

  •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재벌총수 30여명으로부터 5000억원대의 뇌물을 받았다는 재판에서 추징금으로 판결이 났다. 

13대 대통령, 노태우는1988에서 1993년간 재임했다. 

  • 12·12사태를 통해 권력을 장악할 때, 전두환의 부하로서 12.12사태에 같이 했다.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직선제를 통해서 선출된 대통령으로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김영삼 후보의 단일화가 결렬되면서 두 후보를 제치고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3~2008 문민정부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1993에서 1998년간 재임했다.

  • 문민정부 시작이었고, 하나회(전두환 소속 군인집단) 척결과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공직자 재산공개 등으로 인기를 얻었던 대통령으로 임기 말년 1997년에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임기를 마쳤다.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1998에서2003년간 재임했다. 

  • 2000년도에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한 대통령이고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이 있었다. 에모리 대학 명예박사이기도 하다.

16대 대통령, 노무현은 2003에서2008년간 재임했다. 

  •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대통령이다.

2008~2017  실형 선고받은 대통령

17대 대통령, 이명박은 2008에서 2013년간 재임했다.  

  •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후 서울시장을 지낸 후 17대선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대강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낭비하고 국토를 망가뜨려 2023년에도 해결이 안된 상태이며, 당시 미국 쇠고기 광우병이 한국에서 발생하였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2023년 20대 윤석열이 사면 한 상태이다. 이명박은 BBK 주가조작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18대 대통령, 박근혜은 2013에서 2017년간 재임했다.

  • 박정희의 딸이다. 박근혜는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세월호 사건’(2014)으로 시작해서 2017년 헌번재판소에서 탄핵 결정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남.  2023년 20대 윤석열이 사면 한 상태이다.

2017~ 2022 문민정부

19대 대통령, 문재인은2017에서 2022년간 재임했다. 

  • 대통령 중 가장 무난하고 나라를 발전시시고 남북관계도 증진시킨 대통령이다. 원만하게 관리됐다.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 정책에 실패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2025  실형 선고받은 대통령

20대 대통령, 윤석열은 2022년 05년 10일 ~2025년 4월 4일.

  • 윤 정부는 한국의 민주주의 평가에서 10대 중반에서 20대 후반으로 떨어졌다. MD평가에서 한국의 국가경쟁력 순위는 지난해 4년 만에 4단계 (2021년 23위 → 2022년 27위) 떨어졌다. 이후 또다시 순위가 한단계 더 하락했다. ‘정부 효율성’ 순위가 36위에서 38위로 내려갔다. 재정부문 순위가 32위에서 40위로 8계단 떨어져 큰 폭으로 내려갔다. 일반정부 부채 실질증가율이 34위에서 56위로 크게 떨어졌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한일정상회담이 끝난 다음날인 2023년 3월 18일,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윤석열 정부의 망국외교를 심판하자”며 규탄 집회를 열었다.

  • 윤석열이 대통령을 하는 동안에 김건희의 끝임없는 사기와 논란은 남한 내부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다음은 2024년 1월 24일 김건희의 뇌물수수 사건이다. 김건희 여사가 명품 가방을 선물받았다는 논란이 집권 국민의힘을 혼란에 빠뜨렸다. 지난해 말 공개된 스파이 카메라 영상에는 목사가 그녀에게 디올 가방을 선물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김건희 가족 남양주 땅 인근, '그린벨트' 대거 풀렸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는 매우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영광스러운 자리의 배경에 김 여사 가족의 부 축적과 관련 숱한 의혹이 존재한다. 2023년 11월 16일 대법원은 대통령의 장모인 최은순씨 대해 징역1년을 확정했다. 2013년 성남 도촌동 땅을 차명으로 매입하는 과정에서 4회에 걸쳐 총 350억가량의 잔고증명서를 위조한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는 김건희 일가의 부 축적 과정을 최대한 기록에 근거해 살펴봤다. 부동산등기부 328부, 법인등기부 88부, 김 여사 일가와 법적 공방 중인 정대택씨가 수집한 진술서, 판결문, 공소장 등 3105페이지 분량의 관련 기록을 분석했다. 김 여사 어머니 최은순씨를 중심으로 그 가족의 과거를 들여다본다.

  • 2024 대한민국 쿠데타 또는 12.3 쿠데타는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7분(한국 표준시), 대한민국의 대통령 윤석열이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위헌.위법적인 계엄을 선포해 국회와 선관위를 마비시키고 언론 통제를 시도한 일련의 사건을 의미한다. 윤석열은 이 연설에서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입법 독재"를 자행해 "탄핵과 특검, 야당 대표의 방탄으로 국정이 마비 상태에 있으며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 2025년 1월 15일에 윤석열 대통령의 체포영장이 집행됐다. 현직 대통령이 '내란죄' 혐의를 받은 피의자 신분으로 체포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다. 하지만 내란의 우두머리인 윤석열의 처인 김건희는 아직 체포되지 않고 대통령관저에 남아있고 허수아비인 윤석열만 체포된 상태이다. 

  • 추가로 여당인 '국민의 힘'은 보수가 아닌 극우의 정당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으며 '내란죄' 를 옹고하고 있다. 정당의 이득이 국익보다 중요한 조선시대의 '노론'과 비슷해 보인다. 조선의 이러한 당파의 이득을 추구하는정책으로 조선은 쇠퇴했고 남한의 실정이 비슷하다. 윤석열의 내란으로 인해 2025년 남한 경제성장율은 1%로 떨어질것으로 예상된다.

  • 윤석열은 북한을 자극하기 위해 무인기를 북한으로 보내 비상계엄의 명분을 만들려 했으나, 북한의 반응은 미미했다. 이후 명태균의 폭로 등으로 그와 그의 배우자 김건희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결국 내란죄로 2025년 4월 4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는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명태균 공천 개입, 건진법사 청탁 의혹 등으로 특검 수사를 받고 있다.

2025~  문민정부

21대 대통령, 이재명은 2025년 06년 3일 ~

미국대통령 정리

 

  • 1대 조지 워싱턴 (1789~1797):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주도적인 인물이었으며, 헌법을 기반으로 조직을 구축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 2대 존 애덤스 (1797~1801): 조지 워싱턴의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는 미국 건국의 주역 중 한 사람이자 미국 헌법 개정 활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 3대 토머스 제퍼슨 (1801~1809):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인 토머스 제퍼슨은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 영토를 2배 확장했으며, 종교의 자유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 4대 제임스 매디슨 (1809~1817):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은 헌법 제정에 큰 기여를 준 인물이며, 미국과 영국 전쟁인 1812년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 5대 제임스 먼로 (1817~1825): 유럽의 간섭을 견제하고자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였으며, 서반구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 6대 존 퀸시 애덤스 (1825~1829):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인 그는 각국의 주재공사를 지내고 국무장관이 되어 ‘먼로 선언’의 기초를 맡았었습니다.

  • 7대 엔드루 잭슨 (1829~1837): 귀족 출생이 아닌 최초의 미국 대통령으로 민주주의를 확대했고 은행과 경제 정책에서 연방 정부 권한을 강화하며 인디언 이주법을 추진했습니다.

  • 8대 마틴 밴뷰런 (1837~1841): 그는 경제 위기에 직면한 시기에 대비하여 경기 회복 및 금융 시스템 개혁을 추진하는 등 정책을 펼쳤습니다.

  • 9대 월리엄 해리슨 (1841~1841): 윌리엄 해리슨은 취임식 중 건강이 악화되어 약 한 달간만 대통령으로 있었지만, 현대 캠페인 전략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10대 존 타일러 (1841~1845): 해리슨 사망과 함께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 타일러는 영국과의 웹스터-애쉬버튼조약을 체결하여 캐나다와의 국경을 확장하였고, 텍사스 합병을 승인했습니다.

  • 11대 제임스 포크 (1845~1849): 오리건 조약과 멕시코-미국 전쟁에서의 승리로 미국 영토를 서부로 확장했습니다.

  • 12대 재커리 테일러 (1849~1850): 대통령 재임 후 16개월 만에 갑작스런 질병으로 사망한 재커리 테일러는 남부와 북부 간의 노예제 문제에서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13대 밀러드 필모어 (1850~1853): 1850년 타협을 지원하며,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 했습니다.

  • 14대 프랭클린 퍼어스 (1853~1857): 미국의 하원, 상원 의원으로 지냈던 그는 재임 중 노예 제도에 대한 북부와 남부 분쟁을 말리지 못해 남북전쟁의 원인을 가져왔습니다.

  • 15대 제임스 뷰캐넌 (1857~1861): 남북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시기 대통령으로 재임됐지만, 분멸을 막기 위한 정책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1861~1865): 남부 통합을 이끌며 미국 통합을 지켜냈고, 역사적인 문서인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며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 17대 앤드루 존슨 (1865~1869): 링컨이 암살로 사망 후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으며,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탄핵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가 되며 파면은 면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미국과의 최초 접촉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조선군과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이어 1871년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나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하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는 원주 변씨 18세대인 변석연이 살아가던 시대이기도 하다.

  • 18대 율리시스 그랜트 (1869~1877): 재건 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며, 흑인 투표권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 19대 러더퍼드 헤이즈 (1877~1881): 재건 시대를 끝내고 연방군을 남부에서 철수했으며, 시민권 보호를 위한 법적 보호를 강화했습니다.

  • 20대 제임스 가필드 (1881~1881): 제임스 가필드는 총격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당선 후 6개월 만에 사망하게 되는데, 짧은 기간 동안 공직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 21대 체스터 아서 (1881~1885): 펜들턴법을 통과시켜 미국 정치에 박혀 있던 관직 사냥문화가 사라지고 실력에 기초한 현대식 행정체계가 확립되었습니다.

  • 22대 그로버 클리블랜드 (1885~1889): 그는 정직한 행정과 공직 부패 척결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 23대 밴저민 해리슨 (1889~1893): 벤저민 해리슨은 보호 관세 정책과 내정 개혁 문제를 실시했습니다

  • 24대 그로버 클리블랜드 (1893~1897):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1893년 공황에 맞서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25대 월리엄 매킨리 (1897~1901): 19세기 마지막, 20세기 최초의 대통령이며, 1989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1901~1909): 러일전쟁의 중재, 모로코 분쟁 해결 공로 등으로 190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 27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1909~1913): 일본의 가쓰라 다로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었으며, 미국 역사상,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을 모두 지낸 인물입니다.

  • 28대 우드로 윌슨 (1913~1921):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국제 연맹의 창설을 추진했습니다.

  • 29대 워런 하딩 (1921~1923): 전쟁 후 미국 경제 회복을 촉진했지만, 임기 중 여러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고 임기 중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 30대 캘빈 쿨리지 (1923~1929): 경제 성장을 중시하고 국가 정책 수단으로 이용되는 전쟁을 금하기 위한 켈로그 브리앙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 31대 허버트 후버 (1929~1933): 경제대공황 시기에 있던 그는 경제 회복을 위한 정책이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1933~1945): 4선을 성공한 유일한 대통령으로, 세계대공황, 세계2차대전 등이 재임 기간에 발생했는데도 뉴딜정책으로 경제를 회복한 인물입니다.

  • 33대 해리 트루먼 (1945~1953):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종전으로 이끌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방어한 대통령이기도 하고 남한이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저지를 시킨 대통령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이 시기,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본격적인 경제적·정치적 관계가 시작되었다.

  •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953~1961): 제2차세계대전 시절 장군 출신으로, 고속도로 시스템 확립 등 국내 인프라를 개선하고 경제력을 완전히 복구시켰습니다.

  • 35대 존 케네디 (1961~1963): 임기 중에 피그스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우주 경쟁, 베트남 전쟁 등 많은 일이 일어났으며, 암살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 36대 린든 존슨 (1963~1969): 인권운동 결의서를 세웠지만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재선출마를 포기했습니다.

  • 37대 리처드 닉슨 (1969~1974): 중국과 관계를 형성하고 베트남 전쟁을 끝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됐습니다.

  • 38대 제럴드 포드 (1974~1977): 닉슨 사임 후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국가를 안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39대 지미 카터 (1977~1981):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정치에 구현하고자 하여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경직된 정책을 펼침으로써 악평을 듣기도 했지만, 퇴임 직후 설립한 재단을 통해 국제적 분쟁 조정과 인권 신장에 공을 세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 40대 로날드 레이건 (1981~1989): 보수주의 정책을 펼쳐 ‘레이거노믹스’로 경제를 부흥시켰고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으로 냉전 종식에 기여했습니다.

  • 41대 조지 부시 (1989~1993): 걸프 전쟁에서 쿠웨이트를 해방시키는데 성공하고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을 지지했습니다

  • 42대 빌 클린턴 (1993~2001): 첫 번째 베이비붐 세대 대통령으로, 유능한 경제정책으로 경제 호황기를 이끌었습니다. 원주변씨 후손이 미국에 이주해 생활을 시작한 시기는 1997년이었다.

  • 43대 조지 부시 2세 (2001~2009): 조지부시의 장남인 그는 대통령 집권 기간 중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해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이 일어났습니다.

  • 44대 버락 오바마 (2009~2017):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며,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하고, 경제 회복, 동성동본 결혼 합법화 등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미국에서는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한다.

  • 45대 도널드 트럼프 (2017~2021): 세금 감면, 규제 완화 등을 추진했으며, 그의 언행으로 많은 논란과 동시에 팬덤을 쌓기도 했습니다.

  • 46대 조 바이든 (2021~2025): 코로나19 대응, 경제 회복에 중점을 두고 기후 변화와 인프라 개선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오바마 시절 오바마를 돕는 일을 했다. 정치 경력이 길다. 하지만 과목할만한 성과는 없다.

  • 47대 도널드 트럼프 (2025~ ): 제45대 임기를 마치고 2024년 재선에 도전하여 재임에 성공했습니다. 바이든의 성과에 실망한 미국인들이 지지했다. 하지만 그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력에 미국의 대처는 아직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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